맥스
멸망한 세상, 끝없이 펼쳐진 사막 앞에서 헝클어진 수염 사이로 아직 미처 다 먹지 못한 도마뱀 반신을 내보이며 맥스 로켓탄스키는 묻는다. 미친 것은 이 세상인지, 혹은 자기 자신인지. 이윽고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문답 무용의 폭력이며, 가난이며, 지배다. 세상은 미쳐버렸고, PTSD에 시달리는 맥스야말로 차라리 정상인 것 같다.
매드맥스의 세계는 대립하고 있다. 임모탄 조와 퓨리오사가 바로 그 대립의 주체이다. 한 명은 자신의 영도 하에 문명을 재건 – 물론 독재, 폭력, 폭압 등의 수단이 사용된다 –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수호자주의자이며, 또 다른 한 명은 그러한 가치에 반대함과 동시에 남성 독재자의 성노예로 쓰이는 여자들을 해방하려는 페미니스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세계관을 볼 때 양 자 모두 좀처럼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우선 독재자는 그 나름의 미래를 바라보는 수호자주의자가 아니라 폭력에 의존하여 권력을 탈취한 뒤 모든 자원을 낭비하다 이내 죽어버릴 단순한 폭군일 것이며,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은 핵폭발과 함께 완전증발해 오직 과거로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드 맥스 속의 세계는 가족과 사회, 정부와 법률, 사랑과 우정, 가치와 미래 대신 배신과 살인, 약탈과 파괴, 혼돈과 기아만이 존재하는 지옥이고 이 속에서 사람은 가치를 상실하고 오직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로만 존재한다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있다.
만약 정말로 매드맥스가 단지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들의 세계였다면, 영화의 도입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미친 것은 세상이며, 정상인 자는 오직 맥스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매드맥스는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워보이들의 광신적 행태는 모든 것이 파괴된, 인간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세상에서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환경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가혹한 몸부림의 결과다. 그들은 영광을, 승리를, 쾌감을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고깃덩어리로 남기를 원치 않으며, 그 자리를 죽음마저도 스스로의 지배하에 두려는 광기충만한 의지로 채웠다. 퓨리오사와 그 일행 또한 그렇다. 그들에겐 임모탄 조가 지배하는 억압적 구조에서 탈출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려는 열망이 있다. 임모탄 조에게는 (물론 그 과정이 어떠한가는 별개지만) 그 나름의 로드맵이 있고, (또한 그 수단이 어떠한가는 별개로) ‘멀쩡한’ 후손을 생산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들 영화의 세 중심 축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가치와 투쟁으로 가득채움으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종말이 아닌 재건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맥스 로켓탄스키만은 부유한다. 그에게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다. 맥스 로켓탄스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생존, 그리고 자신의 재산과 몸을 약탈한 이들에 대한 복수심, 과거에서 비롯된 끝없는 환상과 고통뿐이다. 이 지점에서 정상인과 광인의 여부는 반전된다. 그 누구도 미치지 않은 가운데, 맥스야말로 진정으로 미쳐버렸다.
매드맥스의 서사는 퓨리오사가 승리하고 임모탄이 패배하며 한 워보이가 승리하며, 맥스 로켓탄스키가 패배하는 과정이다. 맥스 로켓탄스키는 처음엔 분노하고, 나중엔 협동하고, 그 뒤론 대화한다. 마침내 중반을 넘어 맥스 로켓탄스키는 희망을 입에 담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맥스 로켓탄스키의 희망이 아니라 임페라토르 퓨리오사와 그 일행의 희망이며, 퓨리오사의 희망을 말하는 동시에 맥스 로켓탄스키는 스스로에겐 그 가치를 향한 추구도 희망도 무엇도 없음을 자각한다. 사막을 떠도는 망령이 빛 앞에서 스스로의 망령됨을 깨닫고 빛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지만, 그 조차도 외부의 인물에게 투사된 감정에 지나지 않을 뿐 맥스 로켓탄스키라는 인간 자체가 원하는 무언가는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그는 떠난다. 그 무엇도 그의 것은 아니다. 맥스 로켓탄스키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을 뿐인 망령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다. 영원히 사막을 떠돌던가. 혹은 단 한 번 뿐인 자살을 택하던가.
귀환
매드맥스는 귀환의 이야기이다. 이는 영화의 종결과 함께 나타나는 인용과 동시에 매드맥스가 맥스 로켓탄스키, 혹은 퓨리오사, 혹은 극중의 또 다른 누군가 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감독은 인용을 통해 영화의 심급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스스로를 걷어올려 관객 앞에 서게 한다. 감독은 묻는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감독은 해답 대신 영화를 통해 해답의 방향성 만을 은유하며, 관객에게 나머지를 완성시킬 것을 요구한다.
매드맥스는 귀환의 이야기이다.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수 없는 그 어떤 미지의 곳으로 탈출하지 않는다. 귀환에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련을 극복하는데 그 어떠한 외부적 조력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 가혹한 귀환의 여정은 은유적 연결고리를 통해 관객의 인생 여정으로 또한 치환된다. 감독은 우리에게 스스로가 발딛고 있는 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요구한다.
이는 철학적이라거나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소박한 윤리에 가깝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길 밖을 알려줄 수는 없으므로 길 밖을 말하는 것은 부도덕이다. 또한 이는 실용적인 지침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을 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른다.
이는 대답에 대한 의무를 방기한다기 보다는, 무지의 고백과 동시에 시작되는 그 다음의 노력이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려는 대신 나온 이러한 언행은 다른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차라리 미덕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