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 귀환

Posted by Nihila 영화 : 2015. 10. 25. 01:37

맥스

멸망한 세상, 끝없이 펼쳐진 사막 앞에서 헝클어진 수염 사이로 아직 미처 다 먹지 못한 도마뱀 반신을 내보이며 맥스 로켓탄스키는 묻는다. 미친 것은 이 세상인지, 혹은 자기 자신인지. 이윽고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문답 무용의 폭력이며, 가난이며, 지배다. 세상은 미쳐버렸고, PTSD에 시달리는 맥스야말로 차라리 정상인 것 같다.

매드맥스의 세계는 대립하고 있다. 임모탄 조와 퓨리오사가 바로 그 대립의 주체이다. 한 명은 자신의 영도 하에 문명을 재건 – 물론 독재, 폭력, 폭압 등의 수단이 사용된다 –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수호자주의자이며, 또 다른 한 명은 그러한 가치에 반대함과 동시에 남성 독재자의 성노예로 쓰이는 여자들을 해방하려는 페미니스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세계관을 볼 때 양 자 모두 좀처럼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우선 독재자는 그 나름의 미래를 바라보는 수호자주의자가 아니라 폭력에 의존하여 권력을 탈취한 뒤 모든 자원을 낭비하다 이내 죽어버릴 단순한 폭군일 것이며,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은 핵폭발과 함께 완전증발해 오직 과거로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드 맥스 속의 세계는 가족과 사회, 정부와 법률, 사랑과 우정, 가치와 미래 대신 배신과 살인, 약탈과 파괴, 혼돈과 기아만이 존재하는 지옥이고 이 속에서 사람은 가치를 상실하고 오직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로만 존재한다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있다.

만약 정말로 매드맥스가 단지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들의 세계였다면, 영화의 도입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미친 것은 세상이며, 정상인 자는 오직 맥스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매드맥스는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워보이들의 광신적 행태는 모든 것이 파괴된, 인간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세상에서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환경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가혹한 몸부림의 결과다. 그들은 영광을, 승리를, 쾌감을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고깃덩어리로 남기를 원치 않으며, 그 자리를 죽음마저도 스스로의 지배하에 두려는 광기충만한 의지로 채웠다. 퓨리오사와 그 일행 또한 그렇다. 그들에겐 임모탄 조가 지배하는 억압적 구조에서 탈출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려는 열망이 있다. 임모탄 조에게는 (물론 그 과정이 어떠한가는 별개지만) 그 나름의 로드맵이 있고, (또한 그 수단이 어떠한가는 별개로) ‘멀쩡한’ 후손을 생산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들 영화의 세 중심 축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가치와 투쟁으로 가득채움으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종말이 아닌 재건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맥스 로켓탄스키만은 부유한다. 그에게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다. 맥스 로켓탄스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생존, 그리고 자신의 재산과 몸을 약탈한 이들에 대한 복수심, 과거에서 비롯된 끝없는 환상과 고통뿐이다. 이 지점에서 정상인과 광인의 여부는 반전된다. 그 누구도 미치지 않은 가운데, 맥스야말로 진정으로 미쳐버렸다.

매드맥스의 서사는 퓨리오사가 승리하고 임모탄이 패배하며 한 워보이가 승리하며, 맥스 로켓탄스키가 패배하는 과정이다. 맥스 로켓탄스키는 처음엔 분노하고, 나중엔 협동하고, 그 뒤론 대화한다. 마침내 중반을 넘어 맥스 로켓탄스키는 희망을 입에 담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맥스 로켓탄스키의 희망이 아니라 임페라토르 퓨리오사와 그 일행의 희망이며, 퓨리오사의 희망을 말하는 동시에 맥스 로켓탄스키는 스스로에겐 그 가치를 향한 추구도 희망도 무엇도 없음을 자각한다. 사막을 떠도는 망령이 빛 앞에서 스스로의 망령됨을 깨닫고 빛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지만, 그 조차도 외부의 인물에게 투사된 감정에 지나지 않을 뿐 맥스 로켓탄스키라는 인간 자체가 원하는 무언가는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그는 떠난다. 그 무엇도 그의 것은 아니다. 맥스 로켓탄스키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을 뿐인 망령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다. 영원히 사막을 떠돌던가. 혹은 단 한 번 뿐인 자살을 택하던가.

귀환

매드맥스는 귀환의 이야기이다. 이는 영화의 종결과 함께 나타나는 인용과 동시에 매드맥스가 맥스 로켓탄스키, 혹은 퓨리오사, 혹은 극중의 또 다른 누군가 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감독은 인용을 통해 영화의 심급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스스로를 걷어올려 관객 앞에 서게 한다. 감독은 묻는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감독은 해답 대신 영화를 통해 해답의 방향성 만을 은유하며, 관객에게 나머지를 완성시킬 것을 요구한다.

매드맥스는 귀환의 이야기이다.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수 없는 그 어떤 미지의 곳으로 탈출하지 않는다. 귀환에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련을 극복하는데 그 어떠한 외부적 조력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 가혹한 귀환의 여정은 은유적 연결고리를 통해 관객의 인생 여정으로 또한 치환된다. 감독은 우리에게 스스로가 발딛고 있는 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요구한다.

이는 철학적이라거나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소박한 윤리에 가깝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길 밖을 알려줄 수는 없으므로 길 밖을 말하는 것은 부도덕이다. 또한 이는 실용적인 지침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을 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른다.

이는 대답에 대한 의무를 방기한다기 보다는, 무지의 고백과 동시에 시작되는 그 다음의 노력이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려는 대신 나온 이러한 언행은 다른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차라리 미덕에 가깝다.

  

핑퐁 the Animation - 서문

Posted by Nihila 애니 : 2015. 10. 25. 01:35

두 가지 명제가 있다. 재능이야말로 모든 것인가? 아니면 노력이야말로 성공의 원천인가? 이 두 명제는 일본의 스포츠 만화를 지배하고 있다. 어떤 만화의 세계 속에서 재능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오직 재능 만이 있는 세상에서, 재능이 없는 주인공은 멸시당하나 이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 승리를 만끽하며, 재능이 있는 주인공은 재능이 없는 자들을 철저하게 분쇄한다. 반면에 또 다른 세상에선 오직 노력만이 인간의 능력을 발현케한다. 재능은 노력 없이는 그저 썩어들어갈 운명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일 뿐이다. 이 고전적인 대립은 마치 너무나 당연한 듯이, 계속하여 상황과 인물을 변주하며 이어진다. 

스포츠 만화에서 성전과도 같이 숭배받는 재능 혹은 노력은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치명적인 문제들을 내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같은 이 두 단어는영웅적인 주인공 일행과 그 대립자들이 그들 아래의 패배자들을 부정한 자로 격하하기 위한 주된 논거로서 사용됨으로써 실제적 측면에서 단지 그 발현 방식만이 다른 엘리트주의의 아종들임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이 재능 없는 자를 비웃는 상황을 초인적인 노력을 한 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자들을 비웃는 상황으로 치환하는 것은 너무나도 손쉽다. 초인적이라는 영웅성 앞에서 재능은 생득적이며 노력은 그렇지 않다는 명제의 설득력은 상실된다. 초인적인 노력 또한 영웅성이라는 생득적 가치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력을 택하든, 재능을 택하든, 주인공은 처음엔 자기와 같은 자리에 있었던 자들을 남겨두고 훨씬 강했던 상대들을 앞질러간다. 적의 강함은 주인공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한다. 표면적인 논리인 주인공의 노력/재능은 심층적인 논리인, 주인공의 승리를 포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승리는 곧 긍정적인 가치를 함유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 내의 패배는 곧 그 존재의 패배이다. 패배한 자의 사상은 부정된다. 스포츠 게임의 승리를 통해 승리자의 사상마저 승리한다. 이렇게 작품에 의해 지지받는 인물은 단지 스포츠의 고수가 아닌 전인적 초인으로 도약한다. 그리고 작품을 그 초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초월성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므로, 엘리트주의는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의도적인 사상적 배경이 된다. 

  노력과 재능이 스포츠 만화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은 유전이 어떤 방식으로 스포츠 만화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가를 고찰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주역들의 가족은 주역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거나 혹은 본받아야 할 표본으로 종종 나타나곤 한다. 이들 가족들은 주역들에게 여러가지 영향을 끼치는 것 이외에도 결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주역의 가족들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유전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주역들도 또한 뛰어나다는 것이다. 유전이라는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주역의 영웅성은 한 층 더 비범해지며, 범인들과 주역들 사이의 위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장치를 서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뜻 볼 때 재능지상주의를 보이는 작품에서만 사용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비상한 노력 또한 선대가 노력을 통해 비범한 경지에 올랐던 배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주역 또한 가능했다던가 하는 설명을 통해, 노력에 의한 성장 속도, 혹은 노력하는 성향 그 자체가 유전적 혈통에 의해 지지받음으로서, 노력에 의한 승리조차도 기실 후천적인 것에서 선천적인 무언가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장을 통해 노력과 재능은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뒤섞여, 표면적으로 두 성질은 대립하나 내적으로는 동일하다는 모순을 회피하는 것이다.

스포츠 만화 속에서 경기의 승패는 실력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결정된다. 뛰어난 쪽이 이기고, 부족한 쪽이 진다. 그런데 승패와 실력은 단순히 현재를 평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재능과 한계에 대한 예견으로 이어진다. 현재 A에게 패배한 B는 A보다 선천적인 재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며 그 결과 영원히 A는 B보다 더 우월하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인물의 특정한 시간대만을 그리는 특성 상 위와 같은 승부에 의해서 판결된 재능의 차이는 그대로 결말까지 이어져, 한 인물의 인생을 은유적으로 결정짓는다.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둔 자들은 또한 인생 전 시기를 걸쳐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 하거나 몰락한다. 재능의 한계치는 마치  수치적으로 계량화라도 가능한 것처럼 너무나도 단정적으로 밝혀지고 고정된다. 이는 스포츠 만화가 노력/재능이라는 용어를 전개 상의 장치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재능과 노력은 측정가능하다. 그렇기에 재능과 노력을 통해 손쉽게 위계를 설정하고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재능과 노력은 측정 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갈등이 발생한다. 재능과 노력은 측정불가능하기에 한 시기의 모습으로 그들의 한계를 결정지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실력과 연결될 수 없다. 재능과 노력은 측정불가능하며 따라서 한 시기의 흥망을 근거로 개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한 시기는 인생의 부분집합임과 동시에 그 시기의 고유성을 지니며, 따라서 스포츠 만화 속에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 만화는 영원한 현재의 이야기이다. 스포츠 만화는 바로 지금, 목전에 있는 대회에서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가, 그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며 어떤 것을 행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래 또한 밝을 수도 있다. 미래가 어두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빛나고 있다. 그것이 스포츠 만화가 만들어내는 서사인 것이다. 이러한 문법 속에서 구태여 현재와 동기화된 미래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수치화된 재능과 그에 따라오는 고정된 미래라는 클리셰가 어떤 해악을 미치는가가 드러난다. 미래는 한 순간의 미학을 파괴한다. 지금 부상이 악화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뛰기를 결정하거나, 당장 타인을 이길 수 없음에도 노역하는 그 모든 결정을 허망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재능과 노력에 대한 섣부른 재단은 장르를 자기파괴적인 무언가로 몰고 간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스포츠 만화의 뼈대를 구축하고 있으며 따라서 제거할 수도 없다는 이율배반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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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the Animation - 재능

Posted by Nihila 애니 : 2015. 10. 25. 01:34

핑퐁 The Animation은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출발한다. 카타세 고등학교 탁구부의 두 신입, 페코와 스마일은 이질적이다. 그들은 카타세 고등학교 탁구부 속의 또 다른 내집단이다. 실력, 재능, 경험. 모든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다른 부원을 앞서고 있는 이들 두 명은 또한 탁구부 속으로 녹아들지 않고, 오직 그들 두 명만의 탁구부를 만들어 행동한다. 스마일은 웃지 않으며, 페코는 연습에 참가하지 않는다. 페코는 그들의 기원인 타무라에서 신입을 박살내고, 유럽에 갈 것이라는 포부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떠벌인다. 이 시점에서 두 명에게 탁구부는 그저 잠시 거쳐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의 앞으로의 여정 또한 요동친다. 두 명의 인생을 흔드는 것은 또한 그 시점에서 그들보다 압도적인 재능에 의해서다. 중국인 유학생, 콩 웽거는 페코에게 단 1점도 용납하지 않고 그를 철저하게 분쇄한다. 그러나 그 콩 웽거조차 국가대표 경쟁에서 재능이 뒤진다는 이유로 타지에 쫒겨나고 만 처지다. 

서사는 오직 재능이라는 요소 단 한가지에 좌지우지되고 있다. 재능이 뛰어난 스마일과 페코는 탁구부를 대수롭게 여기는 한 편 그 재능 때문에 콩 웽거에게 인생의 변화를 강요당하며, 그것은 콩 웽거 또한 마찬가지다. 핑퐁의 시작은 재능을 통해 설정된 위계, 페코<스마일<콩이라는 도식을, 그리고 이러한 재능의 차를 극복하거나, 혹은 좌절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리라 예상하게 만든다. 소년만화식 스포츠물이 되는 동시에, 그러한 장르의 한계또한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첫 인터하이 예선, 콩 웽거는 그 동안 재능을 자의적으로 방기하고 있었던 스마일이 스스로의 능력을 살리기 시작하자마자 수세에 몰린다. 또한 자신의 사정을 안 스마일이 일부러 져준 덕분에 위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콩은 악몽이라도 꾼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콩의 첫 인터하이는 카자마 류이치라는, 그보다 더한 재능을 만나 비로소 완성된 악몽이 된다. 카자마는 콩을 철저하게 짖밟는다. 콩은 스스로의 패배가 오직 재능의 문제일 뿐임을 확신한다. 콩의 코치는 콩에게 네 인생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말로, 그의 재능은 탁구로 성공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승리는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에게, 패배는 재능이 그에 미치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한편 스마일은 과거 자신에게 거의 이기지 못했던, 사쿠마 마나부에게 져 예선에서 탈락한다. 사쿠마 마나부는 무시무시한 표정과 악담을 제외하면, 노력에 대항하는 재능이라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나, 이는 기실 노력이라는 이름의 재능을 의미할 뿐이므로, 이 시점에서 페코는 자신의 재능을 개화한 사쿠마에게 진 것이 된다. 인터하이 예선에서도 재능이 승리 여부를 결정한다는 사상은 확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작 3화가 흘렀을 뿐인데 재능의 위계는 끝없이 요동친다. 스마일<페코<콩이라는 1화 시점의 위계는 3화에 이르러 페코<사쿠마<콩<스마일<카자마로 바뀐다.

 다음 인터하이 예선에 이르러, 위계는 또 다시 극적으로 반전된다. 첫 인터하이에서 극중 주역들 중 그 누구보다도 뒤떨어진 재능의 소유자로 보였던 페코는 스스로의 재능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임을 완벽하게 증명한다. 스마일은 오직 페코에게만 쓰러질 수 있는 인물로, 페코와의 경기를 제외하면 경기는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스마일의 승리로 끝난다. 한편 첫 인터하이 예선에서의 챔피언이었던 카자마는 외려 페코와 스마일이라는 재능의 험준한 산을 오르는 도전자의 역활로 격하된다. 사쿠마는 스마일에게 패배하여 탁구를 그만두며, 콩은 이제 페코, 스마일, 카자마 그 누구에게도 이기지 못한다. 두 번쨰 인터하이 예선의 시점에 이르러, 재능의 위계는 사쿠마<콩<카자마<스마일<페코로 일변한다.

 이 재능의 키재기는 그러나 결말에서 또한 충격적으로 변화한다. 페코가 독보적인 재능을 뽐내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간다.하지만 첫 인터하이 예선에서 스마일의 뛰어난 실력을 장식하기 위한 제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한 조연 캐릭터는 결말에 이르러 국가 대표에 선발된다. 또한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콩 웽거가 우수한 국가 대표 선수가 되며, 반대로 카자마는 부상에 신음하며 국가대표 선발에 탈락한다.

이 지점에서 핑퐁 the Animation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핑퐁은 재능을 양면적으로 접근한다. 표면적으로 핑퐁은 재능지상주의의 선봉에 선다. 재능이 없는 자는 패배한다. 재능 없는 자는 재능 있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심층적으로, 재능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 페코는 스마일에게 승리한다. 그 뒤 페코는 스마일에게 패배한다. 그 뒤 다시 페코는 스마일에게 승리한다. 카자마는 페코와 스마일 모두를 이긴다.그러나 그 후 카자마는 페코와 스마일 모두에게 진다. 콩은 페코에게 진다. 콩은 스마일을 이긴다. 그러나 또한 콩은 스마일에게 진다. 작 중 주역들은 누군가에게 이기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패배함을 쉴새없이 반복한다. 

그들에게 재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한계 또한 어쩌면 존재한다. 재능이라는 것이 있으며, 각자가 가진 재능엔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어느정도는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는 같은 일을 할 떄 다른 누군가보다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재능을 얼마나 가졌는가는 단지 고등학교 3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은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를 살아간다. 역사적 재능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진입장벽이 초심자 앞에 선다. 모든 입문자들은 진입 장벽에 아로새겨진 방대하고도 거대한 맥락 앞에서 좌절당한다. 한 인간은 단지 스스로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한 자리에 서기 위해서 시험을 강요당한다. 끝없는 발전의 연속 속에서 고등학교는 영원한 미정의 시기가 된다. 그들은 그저 탁구라는 자리의 말석에 앉아있을 뿐이다.

핑퐁은 스포츠 만화가 순간의 장르라는 것을 이용한다. 재능이라는 벽을 뛰어넘는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실제적 측면에서 동일한 재능과 노력을 억지로 분리하여 노력과 진정성을 재능보다도 압도적인(동시에 억지로 분리시킨 재능과 진정성을 그 증명과정 속에서 다시금 재능의 영역으로 재환원하는) 무언가로 격상시키기 위해 재능을 수치화, 정수화 하는 자기 모순을 재반복하는 대신에, 핑퐁은 오히려 그 순간의 시기가 재능을 확정시키지 못함을 보인다. 콩 웽거는 첫 인터하이 직후 미래엔 자기처럼 될 수 있을지를 묻는 탁구부원에게,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러나 겨울, 그는 비슷한 질문에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대답을 바꾼다. 

재능이 확정되지 못함으로 인해 재능이라는 개념은 상실된다. 끝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따라잡고 역전하는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재능이 상실됨에 따라 재능을 극복할 필요성 또한 없어진다. 따라서 재능의 대립항으로서 노력을 제시해야 할 동기조차 없어진다. 자기모순은 해소된다. 그로 인해 서사성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끝없는 변동성 속에서 스포츠물의 순간의 중요성은 증폭된다. 오늘 이기지 못한 상대를 내일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변동성이 모두에게 희망과 동시에 절망을 베푼다. 상존하는 희비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확정되지 않는 내일이어야만이 그들에게 현재를 더욱 충실케하는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핑퐁은 스포츠물에서 재능이라는 망령을 제거함으로서, 스포츠물을 스스로가 있어야 할 본 영역으로 귀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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